- 평점
- 6.7 (2022.10.12 개봉)
- 감독
-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 출연
- 양자경, 스테파니 수, 키 호이 콴, 제이미 리 커티스, 제임스 홍, 탤리 메델, 제니 슬레이트, 해리 슘 주니어, 랜디 뉴먼, 비프 위프, 수니타 마니, 아론 라자르
1. Nothing 과 Everything은 한끝차이
[세상 모든것을 베이글 위에 올려놓으면 진실이 되거든.
(그 진실은) 전부 다.. 부질없다는 것..
기분 좋지 않아?
다 부질없는거면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괴로움과 죄책감이..
사라지잖아.]
-조이-
멀티버스의 모든 우주속에 존재하는 모든 자신을 경험한 주인공 에블린의 딸 ‘조이(joy)’는 이름과는 달리 역설적이게도 전혀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다.
그런 그녀가 각성하여 아무 의미도 없는 ‘조부 투파키’라는 이름을 갖게 된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
그 모든 경험을 통해서 얻은 유일한 해답 ‘아무것도 아닌것(nothing)’만이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모든것(eveything)’이었기 때문이다.
2. Born again
하지만 같은 경험속으로 들어간 엄마 에블린은 한발 더 나아갔다.
그녀는 조부 투파키에게 흡수되기 직전 급작스러운 2단계 각성을 겪는다.
그리고 그 각성을 통해 nothing(조부 투파키)을 끌어안고 ‘조이(joy,즐거움,기쁨)’의 엄마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묘하게도 에블린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성경속 최초의 여성이자 모든 인류의 어머니인 ‘하와’다)
[I! am! your! mother!]
-에블린-
3. 원(circle)과 베이글(bagel)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속에서 상징이나 중의적인 의미를 담을수 있는 표현들에 집착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어떤면에서 자신의 진심을 모호함 속에 가두는 역할을 함으로써 그로 야기될 수 있는 대중이나 평론가의 비난과 같은 곤란한 상황 로부터 피해갈 수 있는 꼼수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것이 소비자의 무의식(잠재의식)에 파고드는 강력한 바이러스가 되어 정신적인 항체를 무력화 시키고 침투해 저항 없이 자리잡게 만들기 때문이다.
‘원(드럼세탁기)은 다른 원(베이글)에 흡수되고
그 원(베이글)은 다시 원(인형 눈알)에 흡수된다.’
(circle과 bagel은 재미있게도 발음상 라임을 이루고 있다.)
에블린의 원 과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은 서로 적대적인 상징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다르지 않다.
두 상징이 닿고자 하는 최종 지점은 제 3의 눈 All seeing eye,
즉 전시안(Eye of Providence)이다.
3-1. 원(circle)의 시작.
행복했던 에블린 가족의 한 순간을 비춘 원형의 탁상 거울이 클로즈업 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거울의 원은 지구 즉 우주를 나타낸다.
마치 평면 우주를 바라보듯 카메라를 따라 서서히 거울에 다가가면
이내 급작스럽게 에블린의 행복한 가족은 거울속에서 사라지고 대신 짐이 가득한 거실 한 쪽 각종 영수증이 수북하게 쌓인 어수선한 식탁이 보인다.
이내 다급하게 주인공 에블린이 등장하고
카메라는 완전히 원(거울) 안으로 진입하고 에블린은 식탁위에 쌓여있는 영수증 더미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멀리서 바라보는 원(거울) 과는 많이 다른 원(거울) 속
이렇게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개의 우주가 대립구도를 보이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에블린이 한 영수증을 바라보며 분류할 위치를 결정하지 못해 고심하는 사이 잽싸게 영수증을 낚아채는 남편 웨이먼드.
에블린의 삶에 무언가가 개입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장난치지마!
시간 없어!]
-에블린-
개입을 막으려는 에블린의 외침.
남편 웨이먼드는 낚아챈 영수증을 에블린 왼편에 놓는다.
이는 당연하게도 웨이먼드에겐 오른편(right)이다.
이미 개입은 시작되었다.
3-2. 에블린의 원
에블린의 원은 자신이 운영하는 코인 세탁소의 드럼 세탁기의 원형으로 표현된다.
쳇바퀴 돌듯 원을 그리며 반복적 으로 돌아가는 많은 세탁기(우주)들중 고장난 세탁기를 하나 발견하고 탄식하는 에블린.
많은 우주중에 지금 비춰지는 에블린의 우주에서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내 이번엔 잘 돌아가던 세탁기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에블린이 문을 열고 신발을 꺼낸다.
[세탁기에 신발 넣지 마세요.
고장나면 변상하세요.]
-에블린-
세탁기처럼 규칙적으로 잘 돌아가던 에블린의 우주에 두번째 개입이 일어난 것.
이 역시 방어하려 애쓰는 에블린.
이번엔 손님이 찾으러 온 세탁물에 장난스러운 남편 웨이먼드가 여기저기 붙여놓은 인형 눈알을 본 에블린.
급기야 폭발해 인형 눈알을 떼어 집어던진다.
[내가 눈알 다 떼라고 했잖아!
눈알좀 붙이지 마!]
-에블린-
3-3. 조이(조부 투파키)의 원
레즈비언인 자신의 현재 모습을 인정도 이해도 해주지 않으며 이야기조차 들어주지 않는 엄마 에블린에 지쳐가는 딸 조이는 자신의 문제들을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베이글에 담아 속으로 삼키기 시작했다.
[어느날 심심해서 베이글 위에 모든것을 올렸지.]
-조부 투파키-
그렇게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에블린의 원(베이글)은 제로(0, 소멸)를 향해 치닫는다.
[그애(조부 투파키)의 정신은 산산조각 나서
모든 우주와 모든 가능성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어.
다중우주의 무한한 힘과 지식을 자유자재로 쓰면서 너무 많은걸 봐서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과 도덕적 관념을 잃고 말았지.]
-알파버스에서온 웨이먼드의 설명-
3-4. 웨이먼드의 원
에블린의 남편인 웨이먼드는 장난끼가 많고 감정적이며 여린 마음을 가졌지만 사실상 영화의 키를 쥐고 있는 가장 강력한 인물.
그의 원은 눈알(eye)로 표현되고 그 눈알은 두개의 원, 즉 흰자위인 에블린의 원과 검은자인 흑화된 조이(조부 투파키)의 원을 동시에 담고 있다.
이 웨이먼드의 원(eye, 해답)은 영화 시작부터 고장난 세탁기와 손님이 찾으러 온 세탁물에 붙어있는것으로 이미 에블린의 주위에 있었다.(하지만 에블린은 다 내던져버린다.)
또 시작부분에 웨이먼드는 에블린의 영수증을 빼앗아 자신의 오른쪽에 놓는것으로 처음부터 에블린의 선택에 개입하고 있었으며
에블린을 무너뜨릴려는 냉정한 세무조사관 디어드리가 영수증에 표시한 원(문제점)으로 부터 바로 잡을 시간을 벌어준다.
결국 에블린은 영화 초반 집어던지면서까지 거부했던 웨이먼드의 원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최종 각성을 통해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자신의 우주의 새로운 균형을 찾게 된다.
3-5. 디어드리의 원
세무조사관 디어드리는 탈세가 의심되는 에블린의 영수증을 발견하곤 크게 여러번 동그라미를 표시한다.
그 원은 어러번 반복되어 흔들리고 완전한 원의 모양을 갖추지 못했다.
[근데 좋아보이질 않아요.
좋.아.보.이.질.않.는.다.구.요.]
-디어드리(의심스러운 영수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디어드리의 원은 혼돈을 의미한다.
4. 포스트 모더니즘(상대주의)
[너무 많은걸 봐서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과 도덕적 관념을 잃고 말았지.]
멀티버스에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이라는 단어는 존재할 수 없다.
심지어 영화에서 두번이나 반복해서 내뱉는 죽음으로 대표되는 ‘통계적 필연성’ 마저도 무용지물이다.
영화의 첫 부분처럼 웨이먼드가 낚아 챈 영수증을 오른쪽에 놓는것이 마주보고 앉은 에블린에게는 왼쪽이 되는것처럼. 모두가 각자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옳고 그름만이 공존할 뿐이다.
거대한 혼돈.
영화는 무엇이든 가능한 멀티버스라는 세계관을 통해, 직접적으로는 레즈비언인 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보수적 아시아계 이민자인 에블린과 할아버지를 통해 또한번 도덕적 상대주의를 주입하고 있다.
5. 전제의 오류
멀티버스 상에서는 사실상 모든것, 모든곳이란 전제가 불가능하다.
다시말해 모든곳에서 모든것을 경험한다는것 자체가 오류다.
따라서 조부 투파키가 말한 ‘베이글 위의 모든것’ 이라는 전제는 거짓이다.
멀티버스란 그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6. 동양철학
마블 영화 ‘어벤저스’의 타노스와 이 영화속 알파버스에서 온 웨이먼드는 닮은점이 하나 있다.
그 둘은 우주의 균형을 맞추고 싶어한다는것.
음과 양의 조화
선과 악의 균형
웨이먼드가 조부 투파키를 제거하려는건 악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라 악을 온전하게 보전하기 위해서다.
[난 오랜 세월 악과 싸워 균형을 맞춰줄 사람을 찾고 있었어.]
-알파버스 웨이먼드-
7. 뉴에이지 사상
지겨운 헐리웃 클리셰중 하나.
쳇바퀴돌듯 돌아가는 에블린의 원을 나타내는 드럼세탁기는 에블린의 삶의 비유하기도 하지만 같은 원통 속에 계속해서 다른이들의 빨래가 담기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반복되는 시간속의 각기 다른 환생(순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순환속에 경험과 진화를 거듭하다가 결국 최종 진화를 거쳐 신의 경지를 끌어안는다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 뱀의 유혹이 실현되는것을 의미하며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
-창세기3장-
에블린은 멀티버스로 비유되는 환생을 통해 진화하며 뉴에이지 사상의 제 3의 눈을 의미하는 웨이먼드의 눈알을 이마에 붙이고 최종 각성에 도달한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었이든 할 수 있다.]
-에블린-
8. 뉴 월드 오더(혼돈속의 질서)
극 소수의 엘리트가 대다수의 국민을 노예로 삼아 지배하려는 전체주의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에 대한 헐리웃의 역할은 미디어를 통해 대중의 무의식에 침투하여 그것을 좋은것으로 위장하고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문화 마르크스시즘’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이미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미디어들이 송출하는 개인 맞춤의 각기 다른 모습들의 같은 메세지에 노출되어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는것에 별 저항을 보이지 않고 침묵하게 된다.
새로운 질서는 필연적으로 기존 질서의 파괴(혼돈)를 필요로 한다.
에블린은 견고했던 질서(영화는 이것을 변화하거나 파괴해 마땅한 고집불동의 소통 안되는 꼰대의 모습으로 비꼬고 있다)에 급하게 인형 눈알로 표현된 새로운 질서(영화는 이것을 다정함과 공감으로 포장하고 있다)를 세우려는 웨이먼드의 노력은 처참히 실패한다.
[내가 눈알 다 떼라고 했잖아!
눈알좀 붙이지 마!]
-에블린(웨이먼드가 붙여놓은 인형 눈알을 내던져버리며)-
하지만 견고했던 에블린의 질서는 베이글로 가장한 또 다른 눈(eye)의 비유인 조부 투파키에 의해 철저하고 집요하게 파괴 당하고 만다.
에블린은 죠죠투바퀴? 라고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만큼 외면하려 에썼지만
결국 또하나의 조부 투파키가 되고 만다.
[조부 투파키?]
-에블린(마침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한다.)-
이제 자신의 질서를 철저하게 파괴당한 에블린은 스스로 던져버렸던 웨이먼드의 인형 눈알을 이마에 붙이고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다가가 손녀의 레즈비언 애인을 당당하게 소개시키는 것으로 뱀의 유혹은 완성 되었다.
(마지막 조부 투파키의 헤어스타일이 뱀의 형상을 한것은 우연이 아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
-창세기 3장-
9. 오컬트
뱀과 한쪽 눈으로 상징되는 전시안(all seeing eye)은 사탄숭배사상으로 볼 수 있는 오컬트와 뉴에이지 사상이 맞닿은 공통 분모이며 이 둘은 다른듯 보이지만 말발굽처럼 양 끝은 가까이 맞닿아 있다.
조부 투바키에 의해 흑화된 베이글은 사실 한쪽 눈으로 상징되는 전시안을 나타낸다.
웨이먼드의 인형 눈알도 그렇다.
영화를 한줄로 표현한다면
전시안에 의해 전시안으로 나아간 에블린으로 해도 이상하지 않을정도.
그만큼 헐리웃의 전시안 편집증은 통계적 필연성을 넘어 그냥 필연이다.
10. 마인드컨트롤
아마도 영화의 숨겨진 메세지중에 가장 핵심은 마인드컨트롤일 것이다.
굳이 숨겨진 메세지라고 할것도 없이 그냥 대놓고 마인드컨트롤이 전부인 영화로 봐도 무방하다.
영화에서 여러번 등장하는 거울이 깨지는 장면은 사실상 마인드컨트롤을 의미하는것이다.
더 상세히 서술하자면 마인드컨트롤에 의한 정신적해리(자아 분열)를 겪는 모습이다.
영화의 전체 내용 또한 에블린이 마인드컨트롤(정산개조) 되는 과정을 멀티버스로 가려놓은것에 불과하다.
웨이먼드와 조부투파키는 에블린의 헨들러(조정자)이며 영화는 한 사람의 마인드 컨트롤 과정과 완성을 담고있다.
이어셋이 작동하면서 마치 뭔가 주입되는듯한 효과음과 초록색 불빛은 마인드컨트롤에 사용되는 환각 약물중 하나인 LSD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
멀티버스의 경험은 그저 환각장용에 불과한 것이다.
11. 또다른 메트릭스
패러디 영화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만큼 이 영화는 정말 많은 영화의 오마주를 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지분은 아마도 ‘메트릭스(1999년)”가 가져갈 것이다.
특히 두 갈래의 선택을 종용하는 메트릭스의 빨간약 줄까? 파란약 줄까? 퍼포먼스의 패러디는 이 영화의 핵심으로 보일만큼 중요한 메세지를 담고있다.
[나랑 같이 가서 잠재력을 발휘 하던지.
여기에 드러누워서 뒷감당 하던지.]
-웨이먼드가 에블린을 향해 선택의 손을 내밀며.-
하지만 빨간약을 선택했던 메트릭스의 네오와는 달리 드러눕는 에블린.
웨이먼드는 그녀의 선택은 안중에도 없고 드러누운 그녀를 들쳐업고 숨는다.
이 장면은 그저 코믹하기만 한 패러디는 아니다.
이제 이 영화가 주는 변화의 메세지들은 더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것.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에블린은 스스로 뭔가를 선택하지 않을뿐더러 한발 더 나아가 이젠 선택에 의해 결과가 바뀌지도 않는다.
영화의 2막의 시작에 다시 집의 식탁으로 돌아온 에블린의 손에는 분류할 곳을 망설이며 들고 있던 영수증이 또 손에 들려있다.
이번에는 1막의 시작과 달리 웨이먼드의 개입 없이 스스로 위치를 찾아 양쪽 모두에 놓는 장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보통 이런 갈림의 선택을 동시에 보여줄 경우 선택에 따른 서로 다른 결과를 보여주기 마련이지만 영화는 정해진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에블린의 변화는 강제적이다.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 당한다가 1막의 시작이었다면, 2막은 어떤것을 선택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는것.
다시말해 선택은 이제 더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12. 조부 투파키의 진실
사실 조부 투파키의 근거는 명확하다.
굳이 멀티버스의 모든걸 경험하지 않더라도 이미 많은 물질주의 진화론 학자들도 이야기 했고 진화론 진영에선 부정할 수도 없는 명제들이다.
심지어 성경의 솔로몬 왕조차도 진화론이 맞다면 인정하는 부분.
[당신도 보이는거야.
세상 모든건 진동하며 중첩하고 있는 미립자의 무작위 재배열에 불과하다는걸.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일은 다른 가능성의 바다로 휩쓸려 사라질 뿐]
-조부 투파키-
[세상은 무의미하게 출렁이는 오물통에 불과하니까!]
-조부 투파키-
[악도 없고 선도 없으며 그저 잔혹한 냉담함많이 있을뿐이다.]
-리차드 도킨스(진화론자)-
[우리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
다만 무었을 선택할지 선택할 수 없을 뿐이다.]
-샘 헤리스(진화론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자기의 모든 수고에서 무슨 유익을 얻으리요?]
-전도서 1장-
그에 반해 에블린의 각성 근거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우리를 하찮은 쓰레기로 느끼게 해줄 뭔가가 있을지 모르지.]
[너와 함께 여기 있고 싶어.]
-에블린-
정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몰랑. 그냥’ 정도가 되겠다.
그 모호함과 불확실성이 모든 자신을 포기하고 여러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조부 투파키의 말을 빌리자면 ‘상식이 통하는 것도 한줌의 시간뿐인 곳’ 에서)의미를 두고 행 할 가치가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것일까?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결론을 내려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최선을 다해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근거나 이유는 부족하지만
따뜻함과 다정함, 서로에 대한 공감을 뭉뚱그려 사랑이라는 울타리로 본다면 어찌됐건 그것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것이 사실이므로 논리적인 해답을 찾기보다는 변하는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 공감과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가는것이 삶의 해답이 아니겠느냐는 정도의 결론 말이다.
하지만 그 한줌의 감정으로 버티기엔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의 흡입력은 무시못할 정도로 강하다.
[오.. 알겠어.
좋은 감정들이 생기고..
막..막 희망이 벅차오르고..말야 그치?
내가 시간을 아껴줄께..
결국에는..
그것들은 전부 사라져.]
-조부 투파키-
14. 버스점프
멀티버스의 다른 우주로의 점프를 위해선 아무런 개연성이 없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규칙이 있다.
립스틱을 씹어먹거나, 신발을 거꾸로 신거나, 싸움도중 춤을 추거나..하는 이 우스꽝 스러운 규칙은
고정관념을 버리고 어떤 변화든지 거부하지 말고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바꾸야만 새로운 우주를 맞이할 수 있고 제 3의 눈을 뜨고 한차원 높은 진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포현한 것일수도 있을것이다.
15. 맥시멀리스트
선반이란 선반은 물론 계단까지 온 집안을 꽉 채운 물건들을 보니 죄다 당근마켓에 에 가져다 팔고픈 욕구가 솟구쳤다.
그렇게 하나의 집안을 꽉 채운 물건들 처럼 영화 또한 한편의 영화에 최대한 많은것을 담았다.
코메디, 액션, 드라마, 철학, 오마주, 패러디, B급 감성으로 비벼낸 맛있는 비빔밥같은 영화지만 경우에 따라선 체할수도 있을만큼 강한 양념덕에 몇 입 먹으보고 숟가락을 던져버릴수도 있을 것이다.
16. 다른 의미의 멀티버스
우주 어딘가에 또 다른 내가 살고 있지 않을까? 라는 문제는 나 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지만 적어도 ‘나’를 잠시 접어둔다면 지금까지 봐온 많은 영화들이 바로 한편 한편 다른 시간과 우주를 다룬 멀티버스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 영화가 차용한 많은 영화들의 오마주 내지는 패러디는 필연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17. 에필로그
리뷰를 써보려고 두번 보았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가지지 못한체로 첫번째 시청을 했을 때는 긴 러닝 타임이 주는 압박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한달에 한편 네이버 멤버쉽으로 받을수 있는 영화쿠폰을 쓰기 위해 볼만한 영화를 찾다가 볼게 없어서 고른 영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압박을 견디면서 보다보니 빠져드는 특별한 뭔가가 있다는걸 느꼈다.
그래서 첫번째 볼때보다 두번째 볼 때는 꽤 재미를 느꼈다.
뭔가 정신없는 병맛코드에 놓쳤던 여러 부분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고 결론은 나와 달랐지만 나름대로 어린시절 치열하게 고민했었던 부분에 대한 공감도 있었다.
그렇게 큰 웃음을 주지는 않았지만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두번째 볼때는 애초에 이 영화가 코메디 영화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번째 볼때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것은 아마도 이 영화가 코메디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것 같다.
멀티버스는 어떤면에서 위안을 주기도 한다.
우주 어디엔가 나보다 더 나은 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은 괜찮은 기분전환용 상상에 속할수 있다.
영화속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에블린이 영화배우로 성공한 자신이 살고 있는 다른 우주를 보면서 가지는 잠깐의 위안같은것 말이다.
그런 빈약하고 부실한 가설들이 주는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기도 하지만,
불확실 할수록 중독성이 강하기에 깊이 빠져드는것을 경계할 필요는 있다.
‘혹시..’와 ‘만약..’ 이라는 문장이 주는 불확실한 위로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그 삶은 그리 건강하지 뭇하게 된다는것도 경험치로 습득한 바 있다.
그래서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확실한것을 붙잡을 필요가 있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볼 필요도 있다.
멀티버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들만의 파산법칙 - 영화 ‘마진콜(2011)’ (0) | 2023.04.04 |
---|---|
상업영화의 역행 - 영화 ‘길복순(2023)’ (0) | 2023.04.01 |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 - SF에서 다큐멘터리로의 진화 (0) | 2023.03.25 |
8번째 죄악 -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2022)’ (0) | 2023.02.22 |
영화 ‘정이(2023)’ - SF 레퍼런스의 폐해 (0) | 2023.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