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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콜래트럴‘(2004) - 헐리우드판 운수 좋은 날

애플시드 2025. 5. 31. 15:36

택시기사 맥스(제이미 폭스 扮)의 일진은 매우 좋아 보인다.
예쁜 여(女) 검사와 썸도 타고, 몇 시간만 손님 빈센트(톰 크루즈 扮)의 대리 기사 역할을 해 주는 것으로 700달러의 보상을 받게 생겼으니,
이대로만 나간다면 어쩌면 그의 꿈인 ‘아일랜드 리무진 사업’의 출발을 앞당길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현진건의 단편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인력거꾼 김첨지가 LA에서 환생한 것일까?
택시기사 맥스의 기분 좋은 하루의 출발은 곧 도시의 비정한 법칙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소시오패스 킬러 빈센트는 오로지 현실과 현재만을 살아간다.
염세적이며 냉정하고, 비정하며 강인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즉흥적인 사건 사고를 받아들이며,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누비고 다니는 차가운 도시(LA)의 밤과 99.9%의 싱크로율을 유지하는 도시 그 자체의 은유적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0.01%의 치명적인 인간성으로 인해 나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맥스를 비웃으면서도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낀다.
결국 죽일 수 있었던 맥스를 살려둠으로써 어쩌면 맥스를 통해 자신의 폭주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를 품었을지도 모른다.

택시기사 맥스는 빈센트와 대립점에 있다.
그는 보편적인 양심을 가지고 하루하루 근면하게 일하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택시에 탄 손님들에게 들려주는 그의 ‘아일랜드 리무진 컴퍼니’ 사업 구상은 얼핏 들으면, 꿈을 위해 열정페이를 감수하며 노력하는 청년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단지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핑곗거리일 뿐이다.
리무진 한 대만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일에 자꾸만 조건을 붙이며, 완벽한 상황이 갖춰지기만을 기다리는 태도는 결국 현실을 회피하는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맥스가 킬러 빈센트와의 만남을 통해 일대 변화를 겪는다.
빈센트의 협박에 줄곧 순종하던 맥스는, 마침내 자신을 겨눈 총구 앞에서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핸들을 꺾어 택시를 전복시킨다.
그 순간, 그는 주체적인 인물로 거듭난다. 이 폭발적인 행동은 그의 전환점을 상징함과 동시에, 영화가 품고 있는 메시지와 몇 가지 익숙한 클리셰를 함께 드러낸다.

1.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이 오기 전까지는 변화하기를 거부한다.
2. 삶의 진정한 변화는 두려움을 극복할 때 이루어진다.
3. 환경이 강력한 도움을 준다고 해도 변화를 위해서는 결국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주체가(핸들을 꺾는 것은) 자신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변화의 목적과 결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가 제시하는 방향은 기존 영화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보편적으로 이러한 변화의 메시지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 의지, 혹은 정신의 확장성과 같은 이상적인 가치와 연결되곤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변화는, 오히려 철저하게 생존이라는 틀에 구속된 적응의 과정으로서의 진화를 의미한다.

이제 맥스는 사회정의로 상징되는 경찰과, 무고한 시민까지 위협하며, 자신의 목적만을 이루기 위해 능동적이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킬러 빈센트의 모습이 되어 가고 있다.

선(善)과 악(惡)이 없는 냉담한 도시.

맥스의 변화는 빠르게 그런 도시화(빈센트화)로 이어진다.

그의 변화는 철저하게 이기적이며 생존적이다.

그는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살인을 목격하고도 침묵하고, 자신과 썸을 탄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만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단순히 이기는 자가 선(善) 이 되고 패배자가 악(惡) 이 되는 도시의 비정한 법칙에서 적자생존만이 답이라는 것을 깨닫기라도 한 걸까?

맥스는 도태되어 가는 나약한 생명에서 생존이 가능한 인물로 진화했고, 그것은 빈센트를 죽이는 것을 넘어 그 시체를 그대로 버려두고 지하철에서 내리는 모습으로 완성된다.

그렇게 0.01%의 나약함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빈센트는 죽었지만, 그로 대변되는 비정한 도시의 법칙은 0.01%를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다음 세대인 맥스에게 전가되어 이어진다.

이봐 맥스. LA 지하철에서 한 사람이 죽는다고 누가 신경이나 쓸까?...
<빈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