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글

넷플릭스 일드 7부작 ‘아수라처럼(2025)’ - 왜 봤을까?

애플시드 2025. 4. 2. 16:30
내가 왜 이걸 다 본거지?

여기까지는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루에 7시간 정도는 흘려보낼 수도 있는 법이고, 그동안 허비한 시간에 비하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니까.

그런데 나를 멈칫하게 만든 건 그 질문에 첨가된 단어 하나 때문이다.

내가 왜 이걸 재미있게 다 본거지?
아수라처럼의 네 자매들

그저 네 자매가 떠드는 그렇고 그런 사생활일 뿐인데..
도대체 내 관심사와는 모든 것이 어긋나는 상황을 왜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왜 이 재미없는 수다에 4자매랑 같이 웃음을 짓고
왜 이 별것도 아닌 사건 전개를 같이 궁금해하고
왜 이 어설프고 답답 시시한 사랑 표현에 살짝 뭉클한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내 안에 다른 내가 숨어 살고 있었던 걸까?
남자도 나이가 들면서 에스트로겐 수치가 증가한다던데 벌써 그 지경에 온 것일까?

아니면 혹시 향수였을까?
내가? 1979년의 일본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는 말인가.
솔비가 로마 공주였던 것처럼 나도 전생에 일본인, 그것도.. 여자였을까?

문득, 어쩌면 그 이유가 드라마 중간중간 울려대는 크고 묵직한 유선 전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가족이 한 회선으로 함께 쓰던 그 전화기.
전화가 와도 높은 확률로 가족의 누군가를 통해 건네받던 수화기.

인터넷에 연결해서 이처럼 블로그도 작성하지 못하고, 카톡도, DM도, 인스타 스토리도 없어서 서로 모여서 마주 보지 않고선 못 배기던 그 시절 유일한 즉석 비대면 소통 창구이자 만날 때와 장소를 정해주던 그 전화기 말이다.  

츠나코, 마키코, 타키코, 사키코
이 진보적이지 못한 4자매와 어머니의 조신한 아우성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젠 아버지의 불륜을 묵묵히 참아내는 어머니도, 그런 아버지를 여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자식들도 없다.
고리타분한 사고방식과 보수적이던 도덕과 수치심의 제한도 사라졌다.

사랑은 직접적이고 관능적이며
소통은 일방적이고 단편적이고
상처와 불편은 즉시 차단된다.

불과 한세대만에 이 모든 것을 바꿔버린 건 다름 아닌 스마트폰이다.

더 이상 마주 보고 숨 쉬지 않는 시대.
받고 싶은 전화만 받는 시대.
SNS의 허영에 자신의 감정을 덮어씌우고 살아가는 시대.

나누고픈 속마음은 온갖 포장과 필터를 거쳐 가공되고 불특정 다수의 감정의 파편이 남긴 ‘좋아요’의 기브 앤 테이크 세상에 1979년의 좁고 깊은 관계의 숨결과 애환이 자리 잡을 곳은 없다.

내가 이 드라마를 끝까지 재미있게 본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성별을 떠나서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더 느껴보고 싶고 더 갖고 싶어진 그 시절의 소통과 감정의 희소가치를 잠시나마 품어볼 수 있었다는 점 말이다.

그것은 드라마가 배치한 미장센들과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도 버스를 기다리는 방식에도 깃들어 있었다.

칸막이 창을 사이에 두고 타키코에게 고백하는 시즈오(왼)

크고 묵직한 유선 전화기 한대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스마트폰은 인간이 가져야 할 고독과 페르소나를 깨트렸다.

모든 것 모든 면에서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적절함과 적당함을 깨우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은 7시간 정도 가만히 예전을 지켜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스토리 요약
내연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노려보는 세 자매

1979년 도쿄, 아버지 코타로(쿠니무라 준 扮)의 오랜 불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모여든 네 자매는 회의 끝에 일단 어머니에겐 비밀에 부치자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남편과 사별 후 꽃꽂이 강사로 일하는 장녀 츠나코(미야자와 리에 扮), 전업주부인 차녀 마키코(오노 마치코 扮),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셋째 타키코(아오이 유우 扮), 찻집에서 일하는 막내 사키코(히로세 스즈 扮)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고 있을 것 같던 네 자매는 아버지의 불륜 문제를 시작으로 서로 소통하게 되면서  각각 식당 사장의 내연녀, 남편의 불륜 의심, 모쏠, 언니에 대한 열등감을 비롯해 각자의 애환과 서로 간의 갈등이 스멀스멀 불거져 나온다.  

식당 사장과의 불륜을 포기하지 못하는 장녀 츠나코

자녀들이 눈치채기 전 이미 진작에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있던 어머니 후지(마츠자카 케이코 扮)는 끝까지 이를 못 본 체 지역신문에 남의 이야기처럼 투고하는 등 자신만의 해소 방법으로 참고 견디다가 결국 쓰러지고 만다.

행복한 모습 뒤에 감춰진 삶의 애환과 원망을 쏟아내며 아치 선한 것 같지만 악한 인도의 신 아수라처럼 뒤에서 험담을 속닥거리면서도 가족과 서로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놓지 않는 네 자매의 이야기.

총평
배추를 절이며 담소를 나누는 어머니 후지와 두 자매 츠나코와 마키코

대중문화가 자극적이고 극적인 할리우드식으로 평준화되면서, 각 나라가 가진 고유한 문화와 분위기를 담은 작품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만이 줄 수 있는 감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MSG를 뺀 담백한 음식이 먹고 나서 속을 편안하게 해주듯, 아수라처럼은 자극적이지 않지만 잔잔하게 스며드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46년 만에 리메이크됐지만, 원작이 가진 섬세한 정서와 시대적 분위기를 크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지 않고 최대한 살린점이 오히려 지금의 관객들에게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리즈

한때 하이틴 톱스타와 국민 여동생 자리를 꿰찼던 일본 여배우들이 자매로 출연해 이들 연기를 보는 것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

미야자와 리에는 1991년 18세의 어린 시절 톱스타의 자리에서 전신 누드집 산타페를 발간해 큰 화제가 됐던 배우였다고..